조선시대의 교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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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교육사

조선시대의 교육1

기본 관점으로서의 유학

유학 및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유학

공자, 맹자에서 비롯되는 유가의 사상을 의미합니다.

공자계열의 학문을 통칭해서 유학이라 한다면

선진의 본원 유학, 한당의 훈고 유학, 송명의 성리학, 청의 고증학 등으로 분류 가능합니다.

조선시대에 등장하는 유학이라는 표현은 성리학과 동일한 의미합니다.

 

성리학

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성명·의리의 학’의 준말입니다.

중국 송대에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고사상을

‘성리·의리·이기’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였는데, 이를 성리학이라고 부릅니다.

남송 시대의 주희의 성즉리 이론에 뿌리는 두고 있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이후 5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기본 관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주리론과 주기론

*이황은 사단은 선과 악이 섞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조선 성리학에 대한 평가

 

유학교육의 전개

국가 주도의 학교교육

성균관

입학자격 : 생원, 진사 등 소과(사마시) 합격자들

(이들을 본과생이라고 하였다 – 정규학생 : 상재생, 상사생)

 

정원을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사부학당의 생도 중에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 중 소학에 능통한 자,

소과의 초시에 합격한 자 등이 입학 가능 (기재생 또는 하재생)

 

성균관의 유생은 관리 등용의 본 시험인 대과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

 

유생들은 성균관에 속한 동서재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부

 

유생들은 성리학의 정신에 토대를 두고 국정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하였고

왕은 이들의 의견을 존중

유생들의 자치활동으로 재회라는 집회가 있었으며,

연명으로 상소하기도 하였다.

(이를 유소, 이 모임을 대의사라고 함)

유소 때에는 사학에서도 함께 참여해서 대궐의 문 앞에서 연좌하여 왕의 답변을 기다렸다.

유소가 여의치 못할 때에는 단식투쟁으로 식당에 출입하지 않는 권당을 시행

이처럼 성균관 유생들은 차지활동과 권익을 보장받았다

 

국란이 있을 때는 충의지심에서 집단 저항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당파싸움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주요 교육내용 : 사서오경, 『근사록』,『성리대전』,『자치통감』등

재정 : 성균관에 소속된 학전에서 거둬들인 수입과 성균관 소속의 외거노비들의 노역으로 충당 (노비도 있었음)

(조선 초 : 2400결, 노비 400명) → 17세기 중엽 : 400결, 노비↓

성균관은 공자를 모신 문묘와 교육 공간이 함께 존재하는 묘학일치

 

사학

사부학당을 줄여서 부르는 명칭 (성균관에 진학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과정 / 중등교육기관 / 예비학교 : 규모나 교육수준↓)

 

향교

지방에 설치된 유학 중등교육기관 (문묘일치 / 조선 중기 이후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기능을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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